한 단어의 문을 열고, 단어가 거느린 세계를 낯설게 두리번거리며, 내가 거기 무엇을 두고 왔는지 생각하는 일.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속는 사람은 물론 나 자신이다. 값싼 패키지여행에서처럼, 점심에는 앞문으로 저녁에는 뒷문으로 다른 간판을 매달고 시치미를 떼는 식당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. 사실은 그 어떤 문도 제대로 열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. 내게 시를 쓸 자격이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.
그러나 그런 자격은 언제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. ‘자격’이라는 단어의 문을 열면, 갓 태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어린 생명들이 종이 상자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. 시작된 이상 무조건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삶이라는 말일 것이다. 누구나 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. 너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고.
그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의 문을 열어보는 쪽으로 나의 시가 움직였으면 좋겠다. 아직 열지 못한 수많은 단어들의 문도 언젠가는 열 수 있었으면 좋겠다. 두고 온 것이 많다는 건 시간에 빚진 마음이 많다는 뜻. 빚진 마음은 반드시 문장이 되게 되어 있다.
―에세이 「빚진 마음의 문장-성남 은행동」 중에서